Thoughts2020. 4. 12. 04:45

"원고 하나를 처리해 줄 것을 부탁했어요."

 

그녀가 건축가 선생에게 관리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집 하나 뿐만이 아니었다. 

 

"비밀번호는 아실 거라고 하더라구요."

 

그는 오륙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큼지막한 랩탑을 내게 건넸다. 내가 비밀번호를 알고 있을 거라고? 잠시 당황했으나 답을 알아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그녀와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녀와 나눈 이야기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 네."

 

"그리고, 이 옆 방을 쓰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내게 주어진 임무는, 최대 한 달 가량을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그녀가 생전에 남긴 원고가 잘 '처리'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관절 그 '처리'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출판인가, 폐기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다른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온전히 내게 맡겨져 있었다.

 

건축가 선생이 떠나고, 나는 서쪽으로 큼지막한 창이 나 있는 방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장을 보고,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아니오"를 패스워드로 입력했다. 패스워드 입력 창 아래 있는 "패스워드 잊음?"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중요한 비밀이 숨겨진 컴퓨터에 로그인해야 하는데, 컴퓨터 주인이 무슨 비밀번호를 썼는지 모르는 거죠. 그래서 그 주인공의 생일, 가족 이름 등등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정보들로 잠금을 풀려고 시도하는데 잘 안되는 거에요.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을 썼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연히 열이 받겠죠? 그래서 "패스워드를 아십니까?"하고 묻는 컴퓨터에게 홧김에 "no"라고 답을 해 버렸는데, 맙소사. 그게 비번이었던 거에요.

 

- 아니 비번 이야기까지 나한테 해도 되는 거에요? 내가 기사에 실어 버리면 어쩌려고.

 

- 제가 좀 쓸데 없는 말이 많아요. 그리고 작가가 열 명이나 되는데 이런 이야기까지 실을 지면이 있으세요?

 

잠금이 해제된 계정의 '내 문서' 폴더에는 '리셉터'라는 디렉터리가 있었고, 그 안에 그녀가 남긴 원고가 있었다. 창밖은 어둑해져 있었고 거리는 고요했다. 컵라면 냄새가 방안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컴퓨터 앞에 앉은 생전의 그녀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창작의 재료를 주로 꿈에서 얻는다고 했다. 뭔가 이상한 꿈을 꾸면 그 꿈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고, 그 의미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특기는 낮잠이요, 취미는 몽상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사뭇 귀엽기까지 한 그 취미와 특기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가 남긴 원고의 문체는 이번에도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컵라면 하나와 맥주 두 캔을 비우며 그 원고를 읽었다. 내용인 즉슨 이러했다. 

Posted by 이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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