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2020. 4. 10. 07:51

그래서 그녀와 20년을 동네 친구로 지낸 건축가 선생님은 두 달 간 그 방을 깨끗이 개조해 주었고 그녀는 그 방에서 세상의 모든 신호와 차단된 채로 혼자만의 조용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몇 명의 친구들, 그러니까 생전의 그녀가 부르기만 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올 정도의 친구 몇 명은 그녀가 세상을 등진 후 며칠 뒤에 그녀 명의로 배송된 등기 우편을 받았다. 그 내용인 즉슨, 편지를 받는 대로 자기 집에 한 번 들러 달라는 것이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전달하는 것이 훨씬 어울릴 정도의 간단한 편지여서, 모두는 바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장례식은 간소했지만, 그녀의 유해가 납골당에 안치된 이후에도 친구들은 그녀가 유서에 남긴 소망들을 들어주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그녀가 남긴 그 집의 소유권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집의 등기를 친구들 몇 명 앞으로 돌려놓기를 원했는데, 조건이 있었다. 2045년이 오기 전까지는 처분하지 말 것과, 아무도 실제로 거주하려 들지 말 것. 또한 유서에 나열된 사람들은 일정이 중복되지 않는 한 언제든 숙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며, 집의 관리 책임은 집을 개조하는 데 도움을 준 건축가 선생에게 맡길 것 등이었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내 이름도 그 가운데 있었다. 

 

나는 그녀와 친밀한 관계였던 적이 없었다. 시애틀로 이주한 다음에는 더더욱 그랬다. 가끔 페이스북을 통해 안부를 묻는 정도의 친분을 유지하긴 했지만, 그녀와 나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만 존재하는 어떤 것, 그러니까 사적인 냄새라고는 없는 어떤 것이었다. 내가 그녀와 친분을 맺게 된 것은 2015년의 여름. 그러니까 내가 '주목할만한 신간' 면의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었을 때였다. 당시 열 명의 신출내기 SF 작가들이 모여 거의 자비 출판에 가까운 형태로 작품집을 출간했는데, 그녀의 단편이 거기 있었다. 

 

그녀의 단편은 인공 지능이 세상을 어떤 과정으로 집어삼키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서 형식을 띠고 있어, 전통적인 소설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설이라면 응당 따라야 할 전통적 형식미의 가치를 중요하게 따지는 사람이라면 거부감을 느낄만한 형태였다. 하지만 다루는 사건의 내용에는 자못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사건의 무대는 2024년. "텅빈 물탱크"라는 장편 소설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다. 줄거리에는 다소 난해한 구석이 있으나 사건의 매듭을 풀어나가는 데 있어 기호학을 활용하는 품새가 에코를 연상시키는 맛이 있고, 다소 신경증적인 주인공의 내면을 탐구하는 문체가 가히 거장의 그것이라는 평을 받은, 단연 독보적 화제작이었다. 당연히 작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으나, 출판사는 작가와 맺은 협약을 이유로 들어 그에 대한 어떤 정보도 공개할 수 없다는 기본 방침만 반복할 뿐이었다. 문체의 유사성, 단어 선택상의 버릇 등을 증거로 실제 작가를 맞춰 보려는 시도도 여러 번 있었으나, 당연하겠지만 그 중 어떤 것도 확증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소설이 출간된 지 1년이 지난 뒤, 한 통계학 박사과정 학생에 의해 그 작가의 실체가 밝혀지게 된다. 제임스 미치너의 팬이었던 그 학생은 "텅빈 물탱크"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이라는 책 에 등장하는 가상의 작품명이라는 데 착안, "소설"에 쓰인 단어와 그 출현 빈도를 계산하여, 그것을 "텅빈 물탱크"에 쓰인 단어 및 그 사용 빈도와 대조하기에 이른다. 결과는 100% 일치. 그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텅빈 물탱크"는 단순히 "소설"에 쓰인 단어를 임의의 방식으로 재조합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지의 여부는 둘째치고, 그런 상상의 사건을 만들어 내는 능력에는 눈길을 끄는 데가 있어서, 나는 그녀와의 인터뷰에 조금 더 많은 시간을 썼다. 내가 그녀에게서 받은 첫 인상은, 그러니까 앞서도 말한 것 같긴 하지만, 선량한 사람, 그리고 세상에 대한 건강한 소망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를 반짝거리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 내겐 없는 것들이어서, 당시 내가 좀 더 한가했다라면 그녀와 조금 더 친해져 보려고 애를 썼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고작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이민 일정 때문에 지면 하나를 채우는 것도 힘겨웠고, 깊이 있는 관계를 만들 틈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유서에 내 이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놀랐다. 대체 왜? 

Posted by 이병준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