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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시애틀 (4)

by 이병준 2015. 11. 14.

시애틀의 겨울은 춥다. 한국의 겨울에 비하면 춥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체감온도는 비슷하면 비슷하지 덜하진 않다. 가장 큰 이유는... 비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 쨍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계속 비가 내린다. 해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우산을 들기도 애매한 부슬비를 맞다보면, 그야말로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부슬비에 젖어 출퇴근을 하다 보면, 뼛 속 깊이 바람든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느낄 수 있게 된다. 젊은 사람이야 그렇게 내리는 비를 낭만삼아 맞고 걸어갈 수도 있는 노릇이겠지만, 나처럼 사십대 중반의 개발자는 안그래도 안 저린 곳이 없는 마당에 비까지 맞다보면 절로 나이를 푸념하게 되고야 만다. 


"리. 한국의 겨울은 어때? 많이 춥다고 들었는데."


동료가 묻는다. 시발 여기도 만만찮다 임마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다 들어간다. 


그래도 따뜻한 차 한잔을 나누며 동료들과 박터지는 요구사항 이야기를 하다 보면, 회의실의 열기는 사뭇 훈훈하다. 요구사항 회의가 그렇게 박터지는 이유는, 잘못된 요구사항을 두고 시간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 모두들 지극히 신중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분위기는, 나처럼 일단 코드부터 저지르고 보는 낙관적인 개발자에게는 그야말로 속터지는 분위기라고 하겠으나, 이해 당사자가 워낙 많을 때는 그 이해관계를 잘 조율하고 보는 것이 프로젝트 관리의 기본인지라, 오히려 속터져하는 나같은 사람이야 말로 욕을 먹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리. 한국에서 했던 프로젝트는 어땠어? 삼성같은 데는 많이 힘들다고 들었는데."


동료가 묻는다. 삼성 안다녔다 임마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다 들어간다. 


한국에서 했던 프로젝트와 다른 점을 굳이 한 가지 꼽으라면, 여기서는 한 디파트먼트의 관리자 쯤 되기 전에는, 여러 프로젝트에 동시에 영향력을 행사하라는 요구는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니어에게 요구하는 것은 보통, 한 프로젝트에 관계된 여러 부서의 이해 관계를 잘 조율하는 것 정도다. 하나의 프로젝트에 관계된 사내 부서가 워낙 많은 것이 보통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관리하는 역할을 맡기고 싶으면, 보통 그 만한 권한을 갖는 자리를 주는 것이 상례다. 그런 자리를 맡길 수 있을 때만 진급시킨다. 진급시킬 수 없어 보이면 그냥 성과에 따라 적절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술적인 리더십이 탁월한 사람은 보직과 관계없이 진급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존경'이라는 무형의 보상까지 덤으로 받는다. 


본격적으로 날씨가 구려지는 가운데 코딩과 디버깅이라는 삽질을 하다보니 손가락과 어깨에 시발 힘들어요 라는 신호가 슬슬 오기 시작한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코딩과 디버깅을 번갈아 하다보면 열이 받아서 머리부터 슬슬 뜨끈해지는 통에, 시애틀의 겨울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석달 기한으로 받은 일거리의 첫 번째 Phase가 끝나간다. 외벌이라, 미국까지 왔어도 살림이 확 피지 않는 것은 한국에서 직장을 옮겼을 때와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졸라 열심히 일해서 보너스라도 듬뿍 받아야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 시발 이 일을 빨리 끝내야 인정 받을텐데... 이러고 있는 것이지. 


"리. 요즘 왜 그렇게 자리에서 안 일어나? 일이 그렇게 많아?"


동료가 묻는다. 너처럼 혼자 벌어 혼자 먹는 사람이 내 심정을 어찌 알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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