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2008.02.04 14:27

산호세 출장가는 길에 영화를 꽤 많이 봤습니다. 비행기 자리마다 LCD가 붙어 있어,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맘대로 골라 볼 수가 있더군요. 참 좋은 세상입니다[각주:1]. 최신 영화도 몇편 보았습니다만, 이번에 제가 본 영화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토요일 밤의 열기" 였습니다. (고전영화 섹션에 있더군요.)

비지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팝 밴드입니다. 집안 어른들이 비지스를 다 좋아한 덕에, 저도 비지스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죠. Saturday Night Fever, Tragedy, Stain' Alive 같은 노래들은 아직도 저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명곡들입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저는 영화광을 자처하며 보낸 20대의 10년 동안에도 이 영화를 단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의 곡이 도배되어 있는 영화임에도 말이죠. 만일 누군가 저에게 "당신의 No. 1 팝 발라드는 무엇인가요?"하고 묻는다면, 저는 아무 주저함 없이 'How Deep Is Your Love' 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런데도 "토요일 밤의 열기"는 본 적이 없었으니... 이상한 노릇이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쨌던, 저는 37세가 되고 나서야, 그것도 비행기 안에서 이 영화를 봤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쯤에는 훌쩍거리고 있었죠. 상상이 가세요? 좀있으면 40이 될 아저씨가 70년대 디스코 영화를 보고 나서는 감정을 주체 못해 훌쩍거리고 있다니. 좀 끔찍한 광경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러가지로 저에게는 뜻깊은 영화였습니다. 보고 나서야 그걸 깨달은 거죠.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는 "깡마른 존 트라볼타"를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존 트라볼타는 등빨 좋은 아저씨이지, 디스코텍에서 허리를 돌리는 날렵한 청년은 아니었거든요. 물론 "펄프 픽션"에서 70년대를 되새김질하는 트위스트를 멋들어지게 추어 보이긴 했습니다만, 어쩐지 둔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존 트라볼타는 정말로 젊어요. 어느 정도로 젊은가 하면, '불확실한 미래를 앞에 두고 방황하는 19살 청년의 질풍노도'가 굳이 연기를 하지 않더라도 느껴질 정도로 젊습니다.

물론 감독인 존 바뎀의 연출력은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닙니다. 그는 시류에 절묘하게 편승한 슬리퍼 히트 무비들을 만들 정도의 재능은 가지고 있는 감독입니다만, 배우의 재능을 100% 이끌어 낸다거나 할 정도로 뛰어난 감독은 아니에요. 그의 영화들이 그런 배우들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구요. 그러나 이 영화에서 트라볼타는 정말로 빛납니다. 그의 눈에는 흔들림이 살아있거든요. (비록 연기는 잘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는 영화 속에서 19살입니다. 곧 20살이 되죠. 그런 그 앞에 그가 꿈꾸던 여자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 여자도 그렇게 완벽한 여자는 아니에요. 그녀는 겉멋에 물들어 있고, 피상적인 꿈을 쫓습니다. 그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유부남과도 정분을 통하죠. 그가 그런 그녀에게 끌린 것은, 그녀가 꼭 '이상적인'여자라서가 아닙니다. 일단은 '춤을 잘 추는 여자'이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과 뭔가 다른 여자'이기 때문이죠. 그에게는 명확한 기준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여자를 고르는 데 있어서도 명확한 기준이 없지요.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엉겁결에 그녀에게 '그럼 우리 좋은 친구로 지내자'라고 말해버립니다. 말하는 순간에도 그는 정말로 그녀와 친구가 되길 원했던 것인지 모릅니다. 확신이 없는 거에요.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20대 시절의 저를 보면, 정말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주관 같은 것은 없었거든요. 그냥 되는 대로 살았던 거에요. 그 시절의 저를 드라이브했던 충동들을 되돌아보면, 50% 정도가 식욕이고 30% 정도가 성욕이었습니다. 지적인 욕구는 10%가 채 되지 않았었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제가 훌쩍거렸던 것은, 아마 그런 그의 눈에서 저의 20대를 발견했기 때문일 거에요. 그리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저의 30대를 보았기 때문이었겠죠.

저는 20대를 '그야말로' 낭비했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들에 20대를 다 갖다 부었죠. 그리고 지금은 30대 후반입니다. 저는 아직도 20대에 제가 낭비했던 시간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굳이 "쇼생크 탈출"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시절의 나로 다시 돌아가 그때의 어리석었던 나에게 말을 건낼 수 있다면...' 이라는 심정으로 하루 하루를 살고 있는 거죠.

* * *

네. 저도 압니다. 이런 식으로 '덧없는 세월'에 대해서 한탄하는 것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저는 제 30대가 정말 고통스러워요. 매일 아침 일어날 때 마다, 저는 제 날들이 그럭저럭 괜찮은 일들과, 지독스럽게 나쁜 일들로 철저하게 나누어져 있는게 아닐까 하고 느낍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떠올리기도 싫고 대면하기도 싫은 어떤 것들이 차례대로 다가오는 것이죠. 설명하기는 좀 힘듭니다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면, 제 30대는 아직도 질풍노도입니다. 제 마음에는 아직 평화와 안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거든요.



 

  1. 여담입니다만, 인터페이스에 약간 버그가 남아있더군요. 가끔 '언어선택' 부분에 언어 이름 대신 undefined 라는 메시지가 찍히곤 했어요. 대한항공 측은 빨리 버그를 수정해야 할듯. ㅋ [본문으로]
신고
Posted by 이병준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

  1. 저도 1월말 미국 출장중에 대한항공 비행기안에서 '세러데이 나이트 피버'를 보았습니다. 저는 중반까지 보다가 한국영화 란의 '즐거운 인생'으로 전환했었지만 말입니다.
    저도 토요일밤의 열기를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시청을 하였습니다.
    영화뿐만이 아니라 책 같은 경우에도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줄거리만 아는 서적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이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2008.02.04 22:0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이경재

    글을 보고 아직 20대의 제 자신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_ㅠ

    2010.03.09 22:1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