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2008.02.11 10:45

샌프란시스코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톤먼트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국내에는 속죄라는 제목으로 원작소설이 번역되어 나와있기도 한 모양이에요. 소설 못읽은지가 백만년은 되어가는 기분이라, 원작 소설이 꽤 멋지더라는 이야기만 들었는데도 호기심이 생겨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는 소설 때문에 영화를 보는 일이 꽤 많았어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때문에 장 자크 아노의 [장미의 이름]을 본다던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스피어] 때문에 베리 레빈슨의 [스피어]를 본다던가, 램의 [솔라리스] 때문에 소더버그의 [솔라리스]를 본다던가... 뭐 그런 일들 말이죠. 요즘은 그런 일이 통 없습니다만.

아무튼, 어톤먼트라는 이 영화는 (대체 왜 제목을 어톤먼트라고 그냥 놔두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꽤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만큼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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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캐릭터들과 그 캐릭터들이 빠진 상황입니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연기하는 세실리아와 제임스 맥어보이가 연기하는 로비에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순수하거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수룩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런 캐릭터들을 그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어보이는 상황 안에다 밀어넣고 그들이 그 상황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라면 목적이겠는데요. 지금껏 만들어졌던 그런 '상황극'들과 이 영화가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사람이 주인공들과 한 가족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아주 어리다는 점(세실리아의 동생인 브라이오니) 정도가 될 것 같아요.

드 팔마의 [캐리]에서 주인공인 캐리를 강박증적인 환경으로 몰고 가는 것은, 섹스에 대한 혐오였습니다. 캐리의 모친은 섹스를 부정한 행위로 생각했고, 사춘기에 접어든 캐리의 몸에 나타나는 2차 성징들을 그런 부정한 행위의 씨앗으로 보았죠. 브라이오니는 그 정도는 아니었겠습니다만, 비슷한 양상의 혐오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캐리와는 달리, 브라이오니의 혐오증은 사춘기 나이의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성적 호기심이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했어요. 문제는 그 혐오증이 세실리아와 로비의 인생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버렸다는 데 있는 거죠. 로비는 난데없이 강간범 취급을 받게 되고, 세실리아는 졸지에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하게 됩니다. 브라이오니는 그 순간 사랑하는 언니를 잃게 되고, 따르던 오빠를 잃게 되죠.

여기까지 보면 이 영화는 굉장히 흥미진진합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영 딴판이에요.

사실 이 영화를 보면 원작소설이 굉장히 복잡하게 서술되어 있었을 거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메멘토] 마냥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복잡하게 이동하는 시간 구조도 그렇고, 마지막의 반전도 그렇습니다. 아마 이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실제로 2008 골든 글로브에서 이미 작품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빼어난 각색의 덕으로 만들어진 각본의 탓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심리 묘사는 소설이 보여줄수 있는 정도만큼 다층적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감독은 영화가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시간 제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듯 여기저기서 과감한 잘라먹기를 시도합니다. 너무나 과감해서, 어떤 때는 그 행위 자체가 예술적으로 보일 정도로요.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결말에 드러나는 반전은 좀 뜬금없습니다. 이런 결말을 보기 위해서 두시간 넘어 기다렸나, 할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그런 과감한 생략을 벌충하려는 듯, 조 라이트 감독은 영화 후반부 초입에서 극적인 롱 테이크를 시도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어마어마한 장면이다, 라는 느낌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장면은 극중 인물들이 잃어버린 몇년간, 전쟁이 주는 참혹함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압축하여 보여준다는 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더군요.

어쩄거나, 그런 장면들이 그다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못한 다는 점은 좀 아쉽습니다. 결말이 허탈하게 느껴지는 점도 그렇구요. 그건 아마 주인공들이 겪었을 고단한 인생 역정이 관객의 마음에 깊숙히 들어올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브라이오니가 겪었을 심적인 고통이 관객의 마음에 충분히 전달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약점이 될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그 부분이 이 영화의 핵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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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