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2010.08.01 18:33
내가 컴퓨터를 처음 접한건 국민(초등)학생일 때 였다. 만화책처럼 묶인 베이직 프로그래밍 입문서를 우연히 구해 읽었는데, 그 뒤로 8비트 컴퓨터를 사 달라고 아버지께 조르고 졸랐다. 결국 내가 처음으로 쓰게 된 컴퓨터는 IQ-1000이라고 불리던 MSX 호환 컴퓨터. 메인보드와 키보드가 일체형이었고, 오래 쓰면 뜨끈뜨끈해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던 컴퓨터였다. 

내가 그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IF-ELSE를 사용한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었다. 뭔가 심각한 일을 할 수 있으려면 디스크 드라이브를 사용해야 할 것 같다는 감은 왔지만 MSX에서 당시 1.4인치 디스크드라이브는 70만원 가까이 하던 고가의 물건이었던 터라, 감히 사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대용품으로 구할 수 있던 것은 그나마 저렴했던 quick-drive. 3.5인치의 디스켓을 사용했던 이 드라이브는 random access가 불가능한 미디어라 고속의 테이프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목록의 가운데에 있는 파일을 지우려면 마지막 파일부터 순서대로 거꾸로 지워 나가는 삽질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컴퓨터 교육을 받은 1세대의 직장인이었다. EDPS같은 용어를 교육받은 첫 번째 직장인이었다는 뜻.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짠 프로그램이 무슨 일을 하는 프로그램인지 어깨 너머로 보고도 대충 짐작하실 수 있었다. 밤새워 게임 소스코드를 입력하고는 디버깅을 하지 못해 쩔쩔매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뭔가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고 대견해 하셨던 기억은 난다.

지금도 조금은 그런 편이지만, 나는 그 때 친구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 책을 들고 다니면서 뻐기는 것을 즐기는, 유치한 자부심에 사로잡혀 있는 소년이었다. 어셈블리 소스 코드가 가득한 책을 들고 다니면서 쉬는 시간마다 책장을 넘기며, 마치 그 모두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낙이었다. 물론, 90% 정도는 모르는 내용이었다. 

디스크 드라이브가 아쉬워서 애플 IIe 컴퓨터를 사달라고 어머니를 조르기 시작했는데,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빠가 필요해서 그러는데... 명함 관리 프로그램 하나만 짜 줄 수 있겠니?"

아버지는 내가 컴퓨터로 하는 일이 고작해야 게임 프로그램을 입력하고, 게임을 하고, 간단한 베이직 프로그램을 짜고, 친구들을 불러 자랑하는 것이 전부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으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그 한 마디 말로 나를 꼼짝못하게 하셨다. (한 마디 말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장기 중 하나였다.)

그 뒤로 내가 한 일은, 베이직으로 명함 관리 프로그램을 짜는 것이었다. 물론 완벽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데이터를 저장하고 불러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그 프로그램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날이 한달 가까이 되었을 때, 나는 애플 IIe 컴퓨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의 선심 덕분이었다. 



애플의 주변기기가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탓에 싼 값에 플로피 드라이브를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뒤로 내가 컴퓨터를 사용하는 패턴이 극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프로그래밍 보다 게임을 더 즐기는 소년이었고, 생산적이기 보다는 소비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했다. 내게 컴퓨터는 그저 남의 집에는 없는 신기한 물건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중3이 되었을 때 쯤에는 컴퓨터에는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그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늘어가기 시작했으니까. 가파르게 기울던 가세도 한 몫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다 프로그래머가 되었는지 신기할 뿐이다.

그 시절의 나는 분명히 프로그래머는 아니었다. 그저 재미삼아 컴퓨터를 만지는, 또래의 아이들 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았던 소년일 뿐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불편한 몸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자식이 하고 싶은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려고 애쓰셨던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런 운을 결코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가끔 키보드를 두들기며 뭔가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나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그 위로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낀다. 내가 썼던 컴퓨터들은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최고의 선물들 중 하나였고, 그 선물들은 결국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 가끔은 궁금하다. 아버지도 내가 컴퓨터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끼셨었을까? 

폴 오스터의 책 제목도 그렇듯, 인생은 우연이 만들어 내는 음악과도 같다. 프로그래밍도 마찬가지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초기 단계에서 내린 많은 결정들이 이리 부딛히고 저리 부딛히며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그 과정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컨트롤하려고 애쓰지만, 인간이 하는 일에 우연이 끼어드는 것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이 애초에 가능하기나 하던가. 

그렇게 따진다면, 아버지는 내 인생의 프로그래머나 다름 없다. 내 인생이라는 랜덤 함수에 최초의 seed를 뿌린 프로그래머. 아버지는 자신이 빚어낸 결과물을 보고 기꺼워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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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

  1. 요즘은 프로그래밍하기가 너무 어려워진게 아닌가 싶습니다.

    개발 도구는 발전하였으나 실제로 쓰기 위해서 준비할 것이 너무 많고 복잡합니다.

    저시절 MSX는 전원만 올리고 바로 베이직 코딩 들어갈 수 있어서 배우는 입장에서 참 좋았습니다.

    2010.08.02 09:1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