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2010.03.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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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려나, 회식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노래방을 나선 모두는 조용히 집으로 향했습니다. 새벽 한시쯤인가, 술에 혀가 꼬부라진 허동수가 전화를 해서 '아직도 술 마시고 있는거냐'고 물은 것을 빼고는, 괜찮은 마무리였습니다. 물론 다음날 회의실에 모여앉은 사람들 가운데 한 두 명 정도는 그때까지도 불콰한 표정이긴 했지만요.

그리고 그때부터 쭈욱, 우리는 프로젝트의 방향을 잡고 개발 일정을 정하고 구체적인 개발 방법을 만들어 가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프로젝트라는 점이 걸리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누군가 완벽한 요구사항 목록을 던져주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만들 시스템의 사용자가 누구며 그들이 무엇을 원할 것인지를 추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놓고 갑과 토론을 해야만 했습니다.

"OLYMPUS의 사용자는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팀장이 질문을 던지자 제 머리 속에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스쳐갔습니다.

"신전의 사용자는 신들이 아닐까요?"

뜬금없는 제 대답에 박팀장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렇긴 해요. 가끔 사용자는 우리가 만들 시스템에 신적인 권능을 요구하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용자는 모두 신들과 같다고 비유해도 무리는 아닐 것 같네요."

그 말에 남기수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우선은 그들이 '어떤 신'들인지 범위는 좁혀 두어야 겠죠."

램은 '솔라리스'라는 소설에서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찬,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신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노는 존재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하지만, 정작 그 결과로 장난감들이 어떻게 망가질 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그런 신 말이에요. 우리가 모셔야 하는 신들이 그러하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요?

"우선 우리 시스템이 플랫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까, 개발자를 주요 타겟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요. 플랫폼을 이용해서 네트워크 관리 시스템을 개발할 사람들 말입니다."

유식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팀장이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플랫폼이 있고... 그 위에 이렇게 개발자가 있다 이 말이군요."

팀장은 UML의 액터(actor) 기호를 그려넣고는, 그 아래에 '개발자'라고 큼지막하게 적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우리가 만들 플랫폼의 경계가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안을 채우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남기수가 나섰습니다.

"그럼 롤 플레이(role-play)를 한번 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롤 플레이요?"

"가상의 개발자를 한 명 두고, 그 사람이 우리 시스템을 실제로 어떤 식으로 사용할 것이며 어떤 기능을 요구할 지 역할극을 한 번 해 보자는 것이죠."

그러자 허동수가 말했습니다.

"재미있겠네예."

그러자 남기수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재미있을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그런 페르소나(Persona)를 만들어 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가 상대할 사용자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용자에게 이름을 붙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름이요?"

박팀장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유식이 말했습니다.

"좋은 생각이네요. 계속 사용자 사용자 사용자 이렇게 부르는 것 보다는, 이름이 있으면 이야기하기 좀 더 편하겠죠.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모두들 이런 저런 이름들을 내 놓았습니다. 저도 하나를 제안했습니다.

"제우스가 어떨까요?"

"제우스요?"

"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수장이기도 하고, 가장 제멋대로인 신이기도 하죠. '사용자는 제멋대로다'라는 개발자 사이의 통념에 비추어 본다면 가장 잘 어울릴 이름일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 말에 모두들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제우스라. 거창하긴 하지만 발음하기도 편하고, 괜찮은 이름이군요.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떠세요?"

"좋습니다."

결국, 우리의 사용자는 제우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팀장은 화이트보드에 적인 '개발자'라는 단어를 지우고, 그 자리에 '제우스'를 큼지막하게 써 넣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제우스씨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들어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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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