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2017.10.31 14:04

"네?"


"그렇잖나. 자네는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옆에 봐줄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네 간병인 노릇까지 하기에 나는 너무 비실비실해. 한 몸 건사 하기도 힘들어. 그리고, 내가 그냥 김치국부터 마시는 것 같긴 하네만, 이웃 사촌한테 그런 건 너무 무리한 부탁 아닌가."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더니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소싯적에 제법 온라인 쇼핑깨나 했음직한 손놀림이었다.


"그럴 싸 한데."


마이크는 모습을 드러낸 로봇을 한 번 쓱 쳐다보고는 메뉴얼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리더니 바로 존에게 건넸다. 


"나 한테는 글자가 너무 작네."


존은 메뉴얼을 받아들었다. 첫 페이지에는 로봇을 활성화하는 방법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로봇이 이상 동작할 경우에 대한 대처법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의 메뉴얼이 그렇듯이, 그 나머지는 전부 있으나 마나한 내용들이었다. 그는 보증서를 빼고 나머지 부분을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DCC-130은 잘 만들어진 인간형 로봇이었지만, 신체 비율은 인간의 그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침팬지의 그것에 가까와 보였다. 다리는 짧고, 팔과 몸통은 길고 머리는 작았다. 관절을 제외한 모든 표면은 흰색으로 무광 처리되어 거의 빛을 반사하지 않았고, 조립을 어떻게 했는지 파악이 어려울 정도로 이음매는 매끈했다. 은색으로 차분히 빛나는 관절도 예외는 아니어서, 연결부위에 틈이 거의 없었다. 키는 대략 5.5피트 정도. 아담한 성인 남성 정도의 크기로, 산업용 로봇에서 느껴지는 위압감 따위는 전혀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손에는 네 개의 손가락이 길게 달려 있었는데, 마디는 보이지 않았다. 발은 옛날 북유럽 지방에서 흔히 신었던 나막신과 닮은 모양으로, 발가락은 없었다. 


거의 완벽한 구형이지만 살짝 위아래로 눌린듯 보이는 머리 가운데에는 두 개의 렌즈가 눈처럼 붙어 있었으며, 그 뒤로는 원형의 시각 센서와 조리개가 보였다. 입이나 귀로 느껴질만한 센서는 보이지 않게 안으로 숨겨져 있었다. 의료용 로봇 보다는 인형에 달아놓으면 더 어울릴 듯한 머리였다.


"왜, 별로 켜 보고 싶지 않은가?"


마이크가 물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해 보죠."


시동 절차는 단순했다. 배송인 이름, 수취인 이름, 수취자 식별 코드를 순서대로 말하면 끝이었다. 그러자 로봇의 왼쪽 가슴 부분에 투명한 하트 표식이 점멸하기 시작하더니 낮게 위이잉,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십여 초 가량 흘렀을까. 약간 엉거주춤했던 로봇의 자세가 점차로 곧게 펴지기 시작하더니, 역시 왼쪽 가슴께에 "사용 준비가 끝났습니다."라는 문구가 잠시 깜빡이다 사라졌다. 


그러자 마이크가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뭐, 기대만큼 쌈빡하진 않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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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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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G2017.10.29 16:36

DCC-130은 의료용으로 생산된 인간형 로봇 가운데 가장 성공한 모델이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인간형 로봇의 사용은 의료 용도로만 허가되어 있으므로 '성공'을 따지기에는 시장이 너무 작은 것 아니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의료 기술의 획기적인 발달 덕에 그 효과가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노령화는 이제 거의 확실한 범 지구적 현상이었다. 로봇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수는 늘어나고 있었고, 시장은 점진적이지만 뚜렷이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DCC-130이 다른 로봇에 비해 그토록 빠른 속도로 보급된 데에는 노령화 이외에도 다른 요인이 있었다. 바로, 인공지능을 탑재한 인간형 로봇에 대한 인류의 지독한 반감을 완화하고도 남음이 있을 법한, 독특한 사용자 경험이었다. 


DCC-130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철저히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은 있을 수 없다'는 철학을 따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작인 DCC-110과는 달랐다. DCC-130은 필요한 순간에만 말했고, 시키지 않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사람과 유사한 신체 구조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인간과 비슷해 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따위는 불러일으킬 수는 없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DCC-130은 환자의 필요를 만족시켜야 하는 경우에만 우아하게 (그러니까 거의 인간이나 다름 없이) 움직였고, 그 이외의 순간에는 1990년대의 영화를 장식했던 대다수의 로봇들처럼 뻣뻣했고 멍청했다. 환자의 신체를 편안하게 받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사항 때문에 무려 일곱개의 관절로 구성된 손가락을 갖고 있었지만, 사람의 지시 없이는 볼펜 한 자루도 자기 마음대로 집으려 하지 않았다. 


그 덕에, DCC-130은 DCC-110과는 다른 길을 갈 수 있었다. DCC-110은 의료용으로 출시되었으나 주로 로봇 화형식의 제물로나 쓰인 반면, DCC-130은 환자들과 함께 도심을 거닐 수 있었고, 필요한 증빙 서류만 갖추면 아마존을 통해 살 수 있는 '아주 조금 특별한' 일반 상품이 되었다. 


그러나 존에게 이 일반 상품은 '아주 조금만 특별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시가 이것만 주문해 놓고 집을 나가버렸다는 거야?"


휑하니 비어버린 집에 남은 가구라고는 소파와 커피 테이블, 그리고 침대가 고작이었다. 존이 고관절 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나는 동안, 제시는 나머지 가구 전부를 들고 집을 떠나버렸다. 그 빈 자리 한 가운데 시트릭서스 사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찍힌, 거의 냉장고 크기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쪽지가 상자에 붙어 있었습니다."


존은 노란색 메모지를 마이크에게 건넸다. 마이크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메모지를 살폈다. 오랜 기자 생활로 남의 글을 읽는데는 이골이 나 있었으나, 이별 통지서를 읽는 것은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제시의 필체는 정갈하고 분명했다. 꼼꼼하고 단호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필체였다. 그리고 그 필체만큼이나, 내용도 단호했다. 


힘든 수술을 받는 당신 곁을 지킬 수 없어서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나로서도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어요. 대신, 이 로봇을 보내요. 회복기간 동안, 당신 곁을 잘 지켜 주리라 믿어요. 


마이크는 쪽지를 반으로 다시 접어 존에게 돌려주었다. 이별 이외의 다른 여지는 전혀 없는 쪽지였다. 그는 생각했다. 과연 이유가 뭘까. 그가 보기에 지난 몇 년간 존과 제시는 그저 유쾌하고 평범한 커플이었다. 회사 일로 지독스럽게 바쁜 존 때문에 제시가 조금 외로워하는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살면서 그 정도의 어려움을 겪지 않는 부부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타인의 가정사는, 기자로서도 쉽게 파고들기 어려운 주제였다. 해 줄 말이 없었다. 질문도 던질 수 없었다. 소파에 창백히 몸을 파묻은 존의 표정은, 질문을 견뎌낼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조용히 몇 분이나 앉아 있었을까, 마이크는 일어나 부엌을 뒤지더니 가위를 찾아 들고는 상자 앞에 섰다. 그리고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으로서는 다른 옵션이 없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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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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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G2017.10.28 17:08

그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긴 어렵겠지요. 내 얕은 지식으로는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사건이었으니까요. 


벌써 육개월이 지났습니다. 어제 일도 제대로 떠올리기 어려워질 정도로 약해져버린 내 기억력으로는, 육개월 전부터 벌어진 그 일의 선후 관계를 온전히 복원해내기도 힘겨웠다는 것을 고백해야겠습니다. 그 덕에,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벽은 수많은 메모지들로 어지럽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당신이 떠난 뒤 거의 완벽하게 공허해져버린 집으로 돌아왔던 첫 날을 떠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을 회상하고, 그 날 있었던 일을 메모지에 옮기고, 그 기억을 벽으로 옮겨 맨 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내 자신을 추스리는 데 거의 한 달은 족히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 날의 기억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손잡이는, 마치 십 수년간 아무도 손을 댄 사람이 없었던 것 마냥,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당신과 십여 년을 함께 살았던 바로 그 집의 현관문 손잡이는, 마치 집을 지은 이래 아무도 찾았던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차갑게, 아주 차갑게 식어 있었습니다. 


물론 과장일 겁니다. 당신이 집을 떠나며 남긴 음성 메모는 불과 내가 돌아오기 하루 전에 남겨진 것이었으니까요. 기억이라는 것은 종종 자기 연민의 결과로 윤색되거나, 과장되곤 합니다. 그 날을 아무런 자기 연민 없이 돌이키기란 불가능했으니, 어쩌면 내 첫 메모가 그처럼 유치한 수사들로 채워진 것은 당연한 일일 겁니다. 


하지만 모든 사건과 미스테리들이 으레 그렇듯, 첫 실마리를 찾는 고통이 끝나자 나머지 부분은 제법 순조로왔습니다. 문제는 어떤 순서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이 가능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렴풋이나마 그 얼개를 따질 수 있게 되는데 까지 또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 대부분은 아마 당신으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일일 겁니다. 그렇더라도, 차분하게 들어주기 바랍니다. 이 일은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 당신과 내가 공유해온 세상이 진화해온 방식을 조용히 바꿔놓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신은 그런 일이 벌어졌건 말건 상관없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것을 앞으로도 큰 차이 없이 즐기게 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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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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