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2013.12.16 17:16

저는 야근을 잘 하지 않습니다. 회사 입사한 이후로, 어지간히 급한 데드라인이 걸려 있지 않으면 야근을 하지 않습니다. 여섯시 반이면 자전거를 몰고 집으로 가서 쉽니다. 물론, 저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많은 관리자들이 야근하지 않으면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도 그런 회사는 많습니다.) 야근을 회사에 대한 충성심의 척도로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가끔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야근을 하지 않느냐고. 이런 질문을 받으면 여러가지로 대답이 곤궁한데, 대체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없던 제품을 만들어 3개월 만에 시연까지 마쳐야 했던 201X년의 어느날, 저는 "3개월만에 만들 수 있겠느냐"라는 윗분의 물음에, "3개월 만에 만들어 보이겠습니다"라고 호기로운 선언을 합니다. 추정키로, 3개월이면 넉넉할 것 같아 보였던 것이죠. 


그러나 정작 업무에 돌입하자, 모든 것이 빡빡해졌습니다. 밑바닥부터 구현을 시작했던 시스템은 도무지 완성될 줄을 몰랐고, 겨우 얼개를 쌓아올린 시스템은 그다지 만족스런 성능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죠. 세상에 없던 소캣 클래스를 구현해야 했고, 세상에 없던 파일 시스템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단말을 물려, 비디오가 성공적으로 전송되고 재생되는 것 까지 보여야 했죠. 


솔직히 말해서, 회사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는 아홉시부터 저녁 퇴근하는 여섯시 반까지,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간식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약간의 시간을 제외하고, 제 눈은 항상 모니터를 보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퇴근할 시간이 되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는 일도 많았죠. 


그러나 이렇게 일할 수록, 저는 '가능하면 야근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야근 한다 해도 여덟시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개발을 진행했습니다.


(1) 진행중인 디버깅은 무조건 다섯시 반까지 마친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다섯 시 반까지 끝낼 수 없는 디버깅은 시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디버깅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로 퇴근하면 집에서도 내내 그 생각만 하게 되기 때문에, 무조건 다섯 시 반에 일을 마감하고, 여섯시 반 까지는 잡무를 처리했습니다. 


(2) 소스 코드 관리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언제든지 이전 상태의 소스코드로 되돌릴 수 있는 준비를 한다: 그 덕에, 수정하고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에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졌을 때 언제나 이전 코드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스템이 이상동작해도, 언제든지 손을 놓고 퇴근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최종 commit 지점으로 돌아가면 충분했기 때문이죠. (이런 류의 작업에는 Git이 갑입니다.)


(3)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는 알 만한 사람들을 귀찮게 한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의 조언은, 거의 항상 저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보여주었습니다. 일단 돌파구라고 생각되는 지점을 만나면 미련없이 진격했고, 그 결과는 거의 항상 성공적이었습니다. 


(4)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3개월 동안, 저는 업무 이외의 분야에는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대화 내용은 항상 일과 관계된 것이었고, 일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탓인지, 최종 시연이 오는 그날까지 아무도 저의 칼퇴근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의 질이지 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점차로, 저와 함께 일하는 직속 상관도, 동료도 모두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결국 저의 평판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가 야근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당신이 어떻게 일하는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직속 상관 마저도 당신에게 야근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직속 상관마저도 당신이 어떻게 일하는 지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자주 보고하세요. 중요한 일은 가장 먼저 직속 상관과 상의하세요. 귀찮더라도 그것이 답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일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던, 이메일을 통해 느끼게 하던, 당신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그 일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알릴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물론 말하거나 보여주지 않아도 그 모든 걸 알아차려 줄 눈썰미 좋은 직속 상관 밑에서 일한다면 문제는 또 다르겠습니다만, 어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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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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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

  1. 키레네

    (4)번이 가능해야 나머지 것들도 가능하겠네요. ^^;
    대부분의 사람들은 (4)번 지키기를 너무 힘들어 하니 ..
    (4)번을 지키셨다는 것 자체로도 대단하고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네요. :)

    2013.12.16 19:0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업무시간중으로 한정하고 식사시간을 빼면 어느정도는 가능하지않을까합니다.^^

      2013.12.16 19:56 신고 [ ADDR : EDIT/ DEL ]
  2. 검은무당벌레

    최근 야근이 뿌쩍 믾아진 시회 초년생입니다. 아직 배워야할 것도 많고 일을 함에 있어서 혼자 하는 것보단 협업 위주의 업무가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잦습니다. 위에 쓰신 글 이외에 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노하우가 더 있는지 궁금합니다

    2013.12.17 00:1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말씀하신대로 숙련도가 낮은 사회 초년생일 때에는, 업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아마 한두 해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좋아질 것인데요. 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고 싶으시다고 하셨죠? 어떤 종류의 일인지 알려주시면 좀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3.12.17 08:51 신고 [ ADDR : EDIT/ DEL ]
  3. 노야그니즘은 저희팀 모토여서 저희팀도 위와같은 방법으로 사람과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노야그니즘으로 3년간 버텨왔는데 이 시간이 누적되다보니 1년전에 팀장님이 "다른팀믄 야근이 잦은데, 일단 우리는 안하니 경영진이 올해는 얘기하네. 그렇게 어려운 프로젝트가 아니었던건지 정말로 능력이 좋아서인지." 하는 얘기를 들으셨나봅니다. 그리고 회사에 잔돈을 벌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하나 더 받으셨습니다. 그래도 야근을 안하려 다들 업무분담을 하여 일을 진행했죠. 근데 올해는 잔돈 프로젝트가 점점 늘어나더니 노야그니즘 3년이 지나니 이제는 고착화 됩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저희 성과를 회사에서는 타팀에도 강요하기 시작했고 타팀은 저희팀을 엄청 싫어합니다. 연봉역시 몇년전이나 3년전이나 지금이나 % 유지가 아닌 강등입니다.
    요지는 이런 개인적 노하우와 노력으로 진행해와도 경영자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고 더욱 플러스 알파를 요구하지 고생흔적을 잘 알아주진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회사 전사적 활동이 아닌 이상에는 타팀과도 교류의 문이 닫히는 상황이고 순수개발자 회사분위기에서 정치라는 것이 시작된 느낌입니다.

    2013.12.17 10:0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전사적인 문제를 언급하시니 가슴이 답답해지는군요. ^^; 말씀하신 문제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사적인 차원에서 성과와 개발 방법론이 충분히 공유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제조업 부문에서 이야기하는 생산 프로세스 개선과 비슷한 레벨에서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어차피 소프트웨어도 '생산'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부분에 대한 공유가 전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개인이나 팀 차원에서 하는 노력이 빛을 잃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전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한 분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윗 선과의 소통이 부족한 상황으로 보이니 말이죠. 물론 제가 닻별님 회사의 상황을 잘 모르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 조차도 '뭘 잘 모르는 소리'로 들릴 가능성은 농후하겠습니다. 자주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17 10:23 신고 [ ADDR : EDIT/ DEL ]
  4.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서로를 이해한다면 당연한 결과인것 같아요! 하지만 현실은 서로를 못믿어서 ㅋㅋ

    2013.12.17 19:1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5. 중요한 것은 회사에 보내는 시간의 질이지 양이 아니라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좋은 글로 많은 점을 느꼈습니다. 5시 반까지 끝낼 수 없는 디버깅은 시작도 않는 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순차적으로 작업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봐야겠네요.

    2013.12.18 10:1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6. Deflame

    이 분.. 제대로 애자일하시네요 ㅇㅇㅋㅋ

    2013.12.18 15:3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7. 사실상 근무시간에 땡땡이 안치고, 웹서핑 1분도 안하고, 업무에만 집중해서 일을 했다면...
    저녁 6시가 되면 녹초가 됩니다.
    더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2014.02.06 18:1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