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2011.04.11 23:22
KAIST에서 벌써 자살만 다섯 건. 모두 같은 이유로 자살을 택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살을 '해결책'으로 택하고 있다는 점만 같다. 

말콤 글래드웰의 '티핑포인트'를 읽어본 분들이면 '유행으로서의 자살'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익숙하시리라. 이 책에서 저자는 '자살'과 '10대 흡연' 간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평가하는데, 그 유사성인즉슨 바로 '모방'이다. 10대가 '쿨'한 셀러브리티들의 흡연 습관을 흉내내듯, '자살'에도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KAIST에서의 자살에도 '쿨'한 측면, 그러니까 따라하고 싶은 무언가가 존재하나?

내 생각으로는 있는 것 같다. '메시지로서의 자살'이 바로 그것.

보통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은 '굉장한 무력감'에 시달리다 최종적인 탈출구로 자살을 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왜 유서를 남기나? 자신에게 있어서 '자살'이 어떠한 의미인지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서에서 간접적으로 억울함을 토로했고, 어떤 학생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학업이 어렵고 힘들었다는 사실을 호소했다.

그런데 정말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최종적인 수단'이 자살 뿐인걸까?

아니다. 원래는 아니어야 맞다. 시위를 할 수도 있고, 노동자라면 파업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호소'를 해야 하는 당사자가 '절망감에 빠진 개인'일 때는 문제가 좀 달라진다. '아웃라이어'에서 초천재 크리스 랭건은 학점을 따기 위해 수업을 옮기고자 하지만, 거부당한다. 그는 결국 홧김에 대학을 관둬 버린다. 그리고는 혼자만의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자족적인 지적 유희를 즐기면서, 세상을 외면해 버린다. 크리스 랭건에게 부족한 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실용적 지식'이었다. 부모에게 학대받느라 건강한 실용지식을 갖출 겨를이 없던 랭건은 세상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랭건은 '절망감에 빠진 개인'이 합리적 판단에서 어떻게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사람은 '절망'과 같은 비관적 감정 상태에 빠지면 당황한다. 당황하게 되면, 이성 대신 본능적 판단이 행동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판단에 지배당하는 개인은, 평소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길을 가기도 한다.

사실 KAIST의 현재 자살율은 MIT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아마 시기일 것이다. KAIST에서의 자살은 유독 최근에 많이 발생했다. 나는, 이 학생들이 자살이라는 해결방식을 모방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의식적으로는 전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들은 당황했기 때문에 평소라면 절대로 택하지 않았을 해결 방법을 모방하는 쪽을 택했다. 그럼 대체 이들은 무엇에 당황했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무엇이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도 살면서 때로 죽고싶을 만큼 절망스러운 순간을 겪지만, 그렇다고 자살을 택하지는 않는다. '당황'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대개의 경우 '아무런 피드백이 없기 때문'이다.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의 케네디도 '음성 알림 기능을 지원하는 지능형 수평계'가 달린 비행기를 몰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나선형 자유 낙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죽음 직전까지 알지 못했다. 자신의 비행상태에 대해 조금 더 일찍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더라면, 그가 몰던 비행기는 수면과 정면충돌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살을 택하는 사람은 보통 혼자이거나, 아니면 스스로 혼자라고 느낀다. 피드백이라고는 없다.  

어떤 피드백도 없는 절망적 당황상태를 잘 극복하는 사람은 보통 천성적으로 느긋하다. '잘 안되면 좀 천천히 하자'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절망에 탄력적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보통 '느릿느릿'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곧 실패이니 절대로 느릿느릿 갈 수는 없다. 문제는 당황한 사람에게 더 빨리 달리라고 주문하면 당혹감만 키우거나 넘어지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이다.

자. 그럼 대체 우리는 학생들을 자살로부터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단기적으로는 우울한 심리 상태에 있는 학생들을 치료해야 한다. 세상과의 피드백이 끊어져 '나 홀로'라는 절망감에 빠져 있는 학생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1~2년 더디게 가더라도 '인생에서 손해볼 것이 없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배움에 늦게 터지는 사람도 있고, 일찍 터지는 사람도 있다.  KAIST 학생이라면 아마 일찍 터진 축일텐데, 그렇다 하더라도 편차는 있다. 사람의 평균 수명은 지금도 길어지고 있다. 의학은 날로 발전하고 있다. 1~2년 늦게 간다고 뭐가 문제인가. 50대 인데도 40대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40대 인데도 30대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중기적으로는 대체 대학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KAIST는 경쟁력있는 과학기술자의 요람이다. 요람은 원래 포근한 곳이다. 포근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세상을 위한 좋은 기술을 만든다. '경쟁력'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평가 중심적이 되고 냉정해진다.

아이들에게, 냉정한 과학을 가르치진 말자. 그리고, 좀 더 느긋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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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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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

  1. 요람은 원래 포근한 곳이다. 포근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세상을 위한 좋은 기술을 만든다.
    이 말이 와닿네요, 정말.

    2011.04.12 10:2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