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2010.11.12 11:02
모든 사람들은 기억에 의존해 살아갑니다. 모든 창조는 기억에 의존하니, 기억하지 않고는 만들 수도 없고, 개선할 수도 없습니다.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한 기억, 프로젝트에 대한 기억, 아키텍처에 대한 기억, 디버깅에 대한 기억 등등 여러가지 기억들에 의지해 생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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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프로그래머 L을 만났습니다. 늦게 시작한 공부를 마칠때가 되어 그런지, 논문 준비에 초췌해진 모습이었습니다. 회사 일 하랴 논문 쓰랴, 까칠해진 그의 얼굴이 여전히 안스러워 보였습니다. 책상에 조용히 기대앉아 있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물었습니다.

- 괜찮아? 힘들어 보이는데...

그런데 저를 돌아보는 그의 눈빛은 어쩐지 서늘하고 허전해 보였습니다. 그는 내 손을 붙잡고 입술을 달싹였습니다. 쉽게 열리지 않는 그의 입술은,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있는 듯 했습니다.

- 도와주세요.

뜬금없이 도와달라니. 업무를 도와달라는 뜻이 아님은, 그의 절박한 표정을 보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믹스 커피를 앞에 두고, 우리는 휴게실에 마주앉았습니다. 도와달라는 말을 할 때 처럼, 그는 다시 힘겹게 운을 뗐습니다.

어제 세시쯤이었어요. 핸드폰 수리 때문에 대리점을 찾았죠. 그리고 핸드폰을 받아왔어요. 다시 깨끗해진 액정을 보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나요. 기분이 좋아서 매점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죠. 뚜껑을 닫고 빨대를 꽂으려 했는데, 마침 뚜껑이 없었어요. 괜찮겠지, 싶어서 그냥 커피를 들고 나왔죠. 빨대 없다고 커피를 마실 수 없는 건 아니잖아요. 천천히 걸었죠. 그런데 비가 왔어요. 후두둑, 갑자기 거세게 쏟아졌죠. 뛰어야 했어요. 비 냄새가 뒤섞인 커피를 마셔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급해졌어요. 그래서 뛰었어요. 그런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어요.

- 그래서?

전화를 받으려다 미끄러졌고, 넘어졌어요.

- 다친데는 없고?

눈을 떠 보니, 곁에 사람들이 서 있었어요. 저를 흔들고 있었죠. 바닥에 머리를 부딛혔나봐요. 잠깐 정신을 잃었던 거죠. 그런데, 일어나 보니 이상하게 개운한 거에요. 여태껏 그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머리가 맑았죠. 괜찮은지 묻는 사람들에게 '멀쩡합니다' 라고 씩씩하게 말한 다음 자리로 돌아왔어요. 십분쯤 지났나, 두통이 생기더군요. 조금 쉬면 괜찮겠지 싶어 눈을 감고 하던 대로 명상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죠.

- 그리고?

눈을 떴어요. 얼마나 잔 건지. 알 수 없었죠. 시계를 보니 네시였지만, 언제 잠이 들었던 건지는 기억나질 않았어요.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무슨 느낌이었냐고요?

- 그래, 뭐가 달라졌다고 느꼈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어요.

- 기억이?

네. 기억이. 기억이 나질 않았죠. 내가 그날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무슨 일을 하게 되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어요. 돌아보니, 주변의 풍경도 생경했죠. 누가 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이상하게 낯설어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누가 부르는 지를 찾으니, 팀장님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아는 팀장님의 얼굴과 달랐죠. 그분이 말씀하시더군요. 'L 선임. 잠시 자리로 와서 이것좀 봐 주겠어?' 자리로 갔습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아무 일 없는 척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분 자리로 가서, 그분이 보라는 문서를 봤습니다. 쓴 사람 이름이 저로 되어 있더군요.

- 그 문서의 내용은 기억이 났어?

아뇨.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팀장님이 이것 저것 물으시는데, 바로 답변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좀 더 생각해보고 말씀드리겠다고 한 다음에,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저는 멀쩡해요. 아니, 온전히 멀쩡하다고 할 수는 없겠죠. 지난 2년간의 기억 일부가 사라졌으니까요.

- 2년간? 그건 어떻게 안거지?

자리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메일함을 뒤지는 것이었어요. 아시잖아요. 네트워크의 도움을 조금만 빌리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아졌죠. 이제 인터넷은 인간의 기억까지 분산시켜 저장해버리고 있으니까요. 메일함을 뒤지면, 내가 어디까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메일함을 가장 최근 날짜부터 옛날까지 순서대로 뒤졌죠.

- 그랬더니?

2년 전 메일에 담긴 내용은 기억이 나더군요.

- 그럼 지난 2년간 무슨 일을 했는지,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거야?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메일을 거꾸로 천천히 읽어 나가다 보니, 머리 속에 뭔가 그림이 떠오르기 시작하더군요. 내가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했고, 무슨 언쟁을 했으며, 뭘 중요하게 생각했었는지가 조금씩 생각났어요. 결국, 업무에 관한 내용은 50% 정도는 되살릴 수 있었고, 팀장님의 질문에도 답을 할 수 있었죠. 팀장님이 언제 바뀌었는지도 다시 생각났구요.

- 그럼 일시적인 기억 상실인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일상적인 일들은 비교적 쉽게 다시 기억해 낼 수 있었어요. 집도 제대로 찾아갈 수 있었고, 아이들이 어떻게 컸는지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 그리고 블로그에 적어놓은 글들, 이런 것들이 도움이 됐죠. 제가 지난 2년간 관심가졌던 일들, 하고자 했던 일들, 그런 것들이 메일과 블로그,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었어요. 그런 것들은, 주변 사람을 걱정시키지 않고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었고, 설사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기억해 버릴 수 있었죠.

그런데 핸드폰에 저장된 주소록에 이르니 좀 난감해지더군요.

- 무슨 문제가 있었는데?

가족을 빼곤, 주소록에 저장된 이름들이 나와 무슨 관계에 있는 것인지 도무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어요.

- 기다리면 되지 않나?

네. 기다리면 되겠죠. 기다리면 분명 연락이 올 겁니다. 연락하게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연락을 해 오겠죠. 그런데 제가 그 사람들에게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죄송한데요 제가 기억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기억나질 않으니 조금만 힌트를 주시겠어요, 이렇게 물어야 하나요?

- 그렇긴 하군. 말하기도 그렇고, 듣는 사람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겠네.

갑자기 병자가 된 기분이에요. 최근까지 작업하던 논문의 내용도 기억이 잘 나질 않아서, 다시 읽어야 했어요. 그리고는 제 컴퓨터와 노트북을 이잡듯 뒤져 소스 코드를 찾았죠. 다행히 데스크탑에 SVN이 설치되어 있었고, 거기에 모든 소스코드의 최신 버전이 있어서 내가 무슨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지 알아내는 건 쉬웠어요. 그 프로그램 가운데 내가 쓰고 있던 논문에 관계된 것을 추리고 걸러내는 일이 힘들었고, 실험 데이터를 어디다 저장해 뒀는지 찾아내는 것이 어렵긴 했지만 말이에요.

- 그런데... 뭘 도와달라는 거지?

제가 지난 2년간, 어떻게 살았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래서 저는 L에게,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단순했습니다. 일찍 출근하고, 일찍 퇴근했으며, 주말에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는 것. 작년에는 머리에 껌이 붙어 머리를 박박 밀어버렸었고 그 일로 모두들 재미있어 했다는 것, 프로그래밍이 아닌 일은 도통 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는 것, 그리고 최근에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새벽기도를 하러 나가는 날에는 기도가 끝나자 마자 부리나케 회사 체육관으로 달려와 몸을 만들었다는 것. 덕분에 식스팩이 생겼다고 팀원들에게 자랑하기도 했다는 것. 회사 사람들에게는 약간 까칠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데 요즘은 사람이 좀 유해졌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담배를 끊겠다는 결심은 도통 지키질 못했다는 것 등등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해 주었습니다. 최근에는 책을 쓰고 있었고, 출판사로부터 출판 제의를 받은 덕분에 내년쯤에는 책을 출간할 예정이었다는 말도 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웃기도 했고, 한숨을 쉬기도 했으며, 도통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거울로 보는 제가 낯설어 보였던 거군요.

- 그렇지, 살이 많이 빠졌으니까.

정신과에는 왜 다녔던 걸까요?

- 모르지.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잠을 못 이룬다고 한번 나에게 말을 했던 적이 었었어. 집안 문제 때문에 골치아프다는 이야기도 했었고. 이런 말 하긴 좀 뭣하지만, L씨는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어.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윈도우즈 최근 문서 목록에 제가 쓰고 있던 한글 파일이 링크되어 있더군요. 프로그래머들에 관한 책이었어요. 재미는 없었지만, 어쨌든 출판 제의는 받았던 거로군요.

그는 한참을 말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함께 그의 자리로 돌아가, 회사 서버에 쌓여 있는 주간 업무보고 목록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엔 지난 2년간 그가 팀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 매주 어떤 업무를 했는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 이걸 보면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좀 될거야.

우리는 함께 많은 것을 살폈습니다.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그가 써 놓은 논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그가 지난 2년간 했던 일의 정수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저널에 투고를 앞두고 있던 그 논문이, 박사 졸업 이외의 다른 곳에도 쓰임새가 생길 줄은, 그도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예상했더라도 기억에서는 사라져버렸을 터이지요.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가 만든 소스코드였습니다. 걱정하기 보다는 만들고 본다는 그의 모토에 걸맞게, 그의 소스 코드는 간결하고 짜임새가 있었지만 주석문이 부실하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자리에 앉아 그 모든 함수들을 하나 하나 밑바닥부터 테스트하고, 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주석문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시스템을 설계할 당시 만들어 두었던 시퀀스 다이어그램과 인수테스트 문서는 시스템의 전체 얼개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최종 시스템 테스트가 끝나고 그가 쌓아올린 모든 코드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는 데 까지 꼬박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그것도 그나마 그가 단위 테스트에는 열심히 주석을 달아 둔 덕분에 일주일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한달이 걸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대한 기억도 다시 되살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gmail 계정을 뒤져, 그가 facebook에 계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의 facebook 계정에는 그가 읽었던 성경귀절, 그리고 그가 했던 고민들이 몇 줄 안되는 문장이지만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가 facebook을 했던 시점이 2년이 채 안되어, 그 이전의 일들은 짐작할 수 없긴 했지만 말입니다.

- 꽤 큰 일을 치룬 것 같군.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그러네요. 꽤 큰 일을 해냈습니다. 선배님 아니었으면 불가능 했을 거에요. 고맙습니다.

- 고맙긴 무슨...

이 일을 하면서, 또 한가지 기억난 게 있습니다.

- 뭔데?

제가 뭔가 잊고 싶어 했다는 걸 기억해 냈어요. 뭘 잊고 싶어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떠올리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떠올리고 싶은 일이었다면, 잊고 싶어 했을 리도 없겠죠. 제 기억 상실이 제 정신적 문제에 대한 방어기제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아니면 신체적 충격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제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고, 이제 그 기억 중 일부는 영원히 되살릴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나버렸다는 사실이겠죠.

우리가 그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MRI며 CT며 열심히 받아본 결과 그의 머리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손상된 것은 그의 기억 뿐이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저에게 남은 것은 행복했던 기억들 뿐이니까요. 이것도 하나님의 은총이라면 은총이겠지요. 고맙습니다 선배. 신세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망각의 강을 건넌다고 합니다. 죽어 망각의 강을 건넌다는 것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아마 이승에서 받은 고통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도 있을 거에요.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승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그가 망각의 강에 발을 담글 수 있었던 것도 나름 행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보고 같은 경험을 하라면? 글쎄요. 제가 짠 소스코드를 남의 것처럼 느껴야 한다는 것 만큼 끔찍한 일도 아마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FIN.

Amnesia (from Greek Ἀμνησία) is a condition in which memory is disturbed or lost. Memory in this context refers either to stored memories or to the process of committing something to memory. The causes of amnesia have traditionally been divided into the "organic" or the "functional". Organic causes include damage to the brain, through physical injury, neurological disease or the use of certain (generally sedative) drugs. Functional causes are psychological factors, such as mental disorder, post-traumatic stress or, in psychoanalytic terms, defense mechanisms. Amnesia may also appear as spontaneous episodes, in the case of transient global amnesia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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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

  1. dhyi123

    가끔 코드를 보면서 "왜 이렇게 짠거야?!" 하며 작성자 욕하다가 로그를 보고 "아~ 이거 내가 옛날에 짠거구나" 이럴 때도 있죠.

    2010.11.16 07:2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나상실

    이거 실화인가요? 재밌어서 소설같은 느낌으로 읽었네요

    2010.12.01 00:5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3.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정말 많이 공감도 되네요~

    저는 거의 10년 동안 HDD 를 날린 적이 딱 한번 있었는데, 그래서 약 한달의 제 기억을 빼고는 다 저장하고 있습니다 ㅋㅋ 한번씩 어디선가 발견되는 10년 전의 문서를 보면 재미있습니다. 동기들의 사진 스캔이라던지, 고전 게임이라던지, mp3 라던지 ㅎㅎ

    2010.12.18 23:4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